책 한 권으로 인생이 바뀌었단 말을 믿지 않는다. 다만 한 권의 책이 삶의 궤적을 틀어버릴 순 있다고 믿는다. 내겐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가 그런 책이다.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가 코로나 유급 휴가를 맞아 읽었다. 지역과 산업이 주제인, 거제도와 조선업이라는 운명공동체를 다룬 글이었다. 아주 훌륭한 책이지만 단지 읽음으로써 거창한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단, 이후 저자와 관계가 이어지며 평범한 공장 노동자에서 작가로 거듭나게 됐다.
이렇듯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이건만 정작 내용을 언급한 적은 별로 없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3월 초순, 탄핵이 거의 확실해서인지 사실상 조기 대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정치권은 평소엔 잠잠하다가 선거만 앞두면 허겁지겁 청년을 부르곤 한다. 나 역시 “청년들이 왜 조선소로 안 오나요?”라는 뉘앙스의 질문을 여러 곳에서 받고 있다. 해답은 이미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 나와 있다. 여기에 직접 겪어 본 현장의 모습을 포개어 대답을 해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
조선소는 기술교육원을 운영한다. 쉽게 말해 인력 양성소다. 보통 용접 분야를 가장 많이 모집한다. 나 또한 약 8주의 기간 동안 교육원에서 용접 교습을 받았다. 257기 교육생 동기는 총 16명. 타지에서 온 이들은 나를 빼고 3명이었는데 현장 배치 2달 만에 모두 관뒀다. 이유야 뻔했다. 일이 힘들다. 사람들도 몹시 사납다. 호황이라길래 와봤는데 여전히 최저임금이다. 무엇보다 ‘미래’가 도저히 안 보인다.
모두 맞는 말이다. 미래가 보였다면 당장 받는 푼돈에 억울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기들은 아침 출근길마다 암담한 전망을 본다. 아침마다 목이 쩍쩍 갈라지도록 외치는 하청 노동자들은 대부분 20년 경력 베테랑임에도 최저임금을 받는다. 이런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이들이 바라는 요구사항을 들어보면 별로 대단하지도 않아서 두 번 놀란다.
찝찝한 마음으로 현장 사무실에 당도하면 열 명 중 서너 명이 외국인 노동자인 현실을 본다. 거제시의 자료를 보면 2024년 한 해 동안 조선업 외국인력은 2427명이 증가했다. 최저임금만으로도 기꺼이 일하는 이들이 있는 한, 회사가 자신의 몸값을 쉽게 올리지 않으리란 계산이 선다.
제대로 된 임금과 대우를 받으려면 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마침 기술교육원과 조선소 경력이 정규직에 유리하다는 솔깃한 소문도 들린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잔인하다. 양대 조선 노동조합과 노동자협의회에 따르면,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의 2024년 현장 생산직 신규 채용은 고작 신입사원 15명, 경력직 45명뿐이다. 바늘구멍을 포복해서 지나가는 일이 더 쉬워 보일 지경이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언급하는 ‘중공업 가족’이란, 남성의 육체노동과 여성의 가사노동 분업으로 일군 거제의 주류 가족상이다. 이 구시대적 가족 구성의 필수 요소는 ‘안정적 고소득이 보장된 가장’이다. 주로 60년대생들인 중공업 가족의 가장들은 현재 정년퇴임 후 하청업체가 바쁠 때 현장에 알바처럼 일하러 온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현황을 추측할 수 있다. 자가 보유 아파트가 있다.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켜 사회 진출까지 다 끝냈다. 입에 겨우 풀칠하고 산다며 앓는 소리 하지만 연금과 소일거리로 충분히 안정적 노후를 확보했다.
조선소에 한 줌 꿈을 안고 왔던 청년들이 꿈꾼 ‘미래’란 바로 이 ‘중공업 가족의 가장’이다. 하지만 여성을 배제하고 정규직이 재생산되지 않으며, 노동자가 가진 숙련의 시장가치가 점점 하락하면서 중공업 가족은 점점 한때 좋은 시절의 환상이 되어갔다. 여기에 영화 <해야 할 일>이 보여주었듯, 2016년 조선업 대규모 구조조정은 중공업 가족 재생산 불가 판정을 내렸다.
중공업 가족의 잔재와 악순환
2025년 3월 현재 조선소, 정확히는 한화오션이 어마어마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주가가 무려 4배가 뛰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선박 건조와 관련해 동맹국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한 데 이어 존 펠란 미 해군장관 후보자는 아예 한화오션을 콕 집어 “그들의 자본과 기술을 미국으로 유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현장에선 이미 우리가 내년에 군함을 건조할 수도 있겠다는 농담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호황의 햇볕은 하청 노동자들에게 드리운 그늘까지는 가닿지 않는다. 아직도 임금체불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하청 소속 30년 경력 반장의 임금은 정규직 3년차 연봉보다 적다. 현재 조선소는 청년에게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일터다.
한국의 대형 조선소는 모두 남쪽 끝단에 박혀있다. 가장 많은 일자리가 몰린 수도권에서 제일 먼 곳이다. 특히 거제도엔 기차도 없다. 입지부터 불리한데 회사 역시 구태여 내국인이 올 만한 동기를 만들 생각이 없다. 그나마 유입되는 청년층이라곤 가족이 조선소에 다녔고, 공부에 별 흥미가 없으며, 지역을 떠날 마음이 없는 거제의 2030 남성 정도다. 23만 인구의 소도시에서 이에 해당하는 인구집단이 몇이나 되겠는가.
타지에서 온 청년들은 극악한 지리 조건을 뚫고 조선소까지 당도했지만 위에서 말한 ‘미래가 없음’이란 문제와 마주한다. 그렇다고 당장 마주하게 되는 현재가 아름답지도 않다. 중공업 가족을 만들었던 고소득은 초과 노동에서 나왔다. 상여금을 많이 주는 대신 낮은 시급을 책정해 초과 노동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갔다.
조선소의 ‘기본 노동시간’은 사실상 8시간이 아니라 9시간이다. 저녁 식사도 9시간 퇴근에 맞춰서 나온다. 출근은 사무실에 7시 30분까지 당도해야 하므로 7시쯤엔 조선소 문을 통과해야 한다. 퇴근 또한 6시에 퇴근 절차인 ‘타각’을 시작하므로 조선소를 빠져나올 땐 이미 6시 반이다. 여기에 토요일 노동도 당연한 분위기다.
그러니 남아있는 노동자는 돈벌이가 절실한 외국인 노동자와 가족들이 있는 중년 남성이 다수다. 평일 9시간에 주말 근무까지 더하면 이미 52시간 초과 노동이다. 부양가족이 없는 청년들은 그토록 오래 일할 동기가 없다. 꼬박 8시간씩 일해서 받는 210만 원과 53시간을 꽉 채워 받는 300만 원의 차이는 1.5배에 달하지만 삶의 질이 몇 배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건강을 일부 희생하며 피로를 그대로 집까지 들고 와야 하는 육체노동은 특히 그렇다. 젊은 피가 돌지 않는 업종에 미래는 없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2019년에 출간됐다. 저자는 당시에도 사무실과 현장이 수도권과 지방으로 쪼개지는 현상을 염려했다. 2025년 기업은 더더욱 가열차게 수도권과 지방, 구상과 실행, 계획과 생산을 분리하려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조선소는 ‘단지 배를 생산할 뿐’인 거대 공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정치에서 해법을 찾아보려 해도 윤석열 정부가 여지를 없애버렸다. 인간다운 대우를 원해 파업했던 하청 노동자의 삶이 박살나도록 거들었다. 외국인 노동자를 더 들여올 수 있도록 특혜까지 줬다. 정치권도 문제를 알지만 해법이 좀처럼 보이지 않아 “정규직 많이 좀 뽑아주세요”, “외국인 노동자에만 너무 의존하지 맙시다” 정도밖에 말할 수 없다. 주가가 치솟아 자본은 신났지만 노동은 암울한 모습이 조선소의 현주소다.
역대급 호황 조선소 청년들이 2달 만에 그만둔 이유
[View] 다시 본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여전히 최저임금에 미래 안 보여
책 한 권으로 인생이 바뀌었단 말을 믿지 않는다. 다만 한 권의 책이 삶의 궤적을 틀어버릴 순 있다고 믿는다. 내겐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가 그런 책이다.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가 코로나 유급 휴가를 맞아 읽었다. 지역과 산업이 주제인, 거제도와 조선업이라는 운명공동체를 다룬 글이었다. 아주 훌륭한 책이지만 단지 읽음으로써 거창한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단, 이후 저자와 관계가 이어지며 평범한 공장 노동자에서 작가로 거듭나게 됐다.
이렇듯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이건만 정작 내용을 언급한 적은 별로 없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3월 초순, 탄핵이 거의 확실해서인지 사실상 조기 대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정치권은 평소엔 잠잠하다가 선거만 앞두면 허겁지겁 청년을 부르곤 한다. 나 역시 “청년들이 왜 조선소로 안 오나요?”라는 뉘앙스의 질문을 여러 곳에서 받고 있다. 해답은 이미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 나와 있다. 여기에 직접 겪어 본 현장의 모습을 포개어 대답을 해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
조선소는 기술교육원을 운영한다. 쉽게 말해 인력 양성소다. 보통 용접 분야를 가장 많이 모집한다. 나 또한 약 8주의 기간 동안 교육원에서 용접 교습을 받았다. 257기 교육생 동기는 총 16명. 타지에서 온 이들은 나를 빼고 3명이었는데 현장 배치 2달 만에 모두 관뒀다. 이유야 뻔했다. 일이 힘들다. 사람들도 몹시 사납다. 호황이라길래 와봤는데 여전히 최저임금이다. 무엇보다 ‘미래’가 도저히 안 보인다.
모두 맞는 말이다. 미래가 보였다면 당장 받는 푼돈에 억울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기들은 아침 출근길마다 암담한 전망을 본다. 아침마다 목이 쩍쩍 갈라지도록 외치는 하청 노동자들은 대부분 20년 경력 베테랑임에도 최저임금을 받는다. 이런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이들이 바라는 요구사항을 들어보면 별로 대단하지도 않아서 두 번 놀란다.
찝찝한 마음으로 현장 사무실에 당도하면 열 명 중 서너 명이 외국인 노동자인 현실을 본다. 거제시의 자료를 보면 2024년 한 해 동안 조선업 외국인력은 2427명이 증가했다. 최저임금만으로도 기꺼이 일하는 이들이 있는 한, 회사가 자신의 몸값을 쉽게 올리지 않으리란 계산이 선다.
제대로 된 임금과 대우를 받으려면 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마침 기술교육원과 조선소 경력이 정규직에 유리하다는 솔깃한 소문도 들린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잔인하다. 양대 조선 노동조합과 노동자협의회에 따르면,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의 2024년 현장 생산직 신규 채용은 고작 신입사원 15명, 경력직 45명뿐이다. 바늘구멍을 포복해서 지나가는 일이 더 쉬워 보일 지경이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언급하는 ‘중공업 가족’이란, 남성의 육체노동과 여성의 가사노동 분업으로 일군 거제의 주류 가족상이다. 이 구시대적 가족 구성의 필수 요소는 ‘안정적 고소득이 보장된 가장’이다. 주로 60년대생들인 중공업 가족의 가장들은 현재 정년퇴임 후 하청업체가 바쁠 때 현장에 알바처럼 일하러 온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현황을 추측할 수 있다. 자가 보유 아파트가 있다.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켜 사회 진출까지 다 끝냈다. 입에 겨우 풀칠하고 산다며 앓는 소리 하지만 연금과 소일거리로 충분히 안정적 노후를 확보했다.
조선소에 한 줌 꿈을 안고 왔던 청년들이 꿈꾼 ‘미래’란 바로 이 ‘중공업 가족의 가장’이다. 하지만 여성을 배제하고 정규직이 재생산되지 않으며, 노동자가 가진 숙련의 시장가치가 점점 하락하면서 중공업 가족은 점점 한때 좋은 시절의 환상이 되어갔다. 여기에 영화 <해야 할 일>이 보여주었듯, 2016년 조선업 대규모 구조조정은 중공업 가족 재생산 불가 판정을 내렸다.
중공업 가족의 잔재와 악순환
2025년 3월 현재 조선소, 정확히는 한화오션이 어마어마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주가가 무려 4배가 뛰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선박 건조와 관련해 동맹국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한 데 이어 존 펠란 미 해군장관 후보자는 아예 한화오션을 콕 집어 “그들의 자본과 기술을 미국으로 유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현장에선 이미 우리가 내년에 군함을 건조할 수도 있겠다는 농담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호황의 햇볕은 하청 노동자들에게 드리운 그늘까지는 가닿지 않는다. 아직도 임금체불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하청 소속 30년 경력 반장의 임금은 정규직 3년차 연봉보다 적다. 현재 조선소는 청년에게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일터다.
한국의 대형 조선소는 모두 남쪽 끝단에 박혀있다. 가장 많은 일자리가 몰린 수도권에서 제일 먼 곳이다. 특히 거제도엔 기차도 없다. 입지부터 불리한데 회사 역시 구태여 내국인이 올 만한 동기를 만들 생각이 없다. 그나마 유입되는 청년층이라곤 가족이 조선소에 다녔고, 공부에 별 흥미가 없으며, 지역을 떠날 마음이 없는 거제의 2030 남성 정도다. 23만 인구의 소도시에서 이에 해당하는 인구집단이 몇이나 되겠는가.
타지에서 온 청년들은 극악한 지리 조건을 뚫고 조선소까지 당도했지만 위에서 말한 ‘미래가 없음’이란 문제와 마주한다. 그렇다고 당장 마주하게 되는 현재가 아름답지도 않다. 중공업 가족을 만들었던 고소득은 초과 노동에서 나왔다. 상여금을 많이 주는 대신 낮은 시급을 책정해 초과 노동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갔다.
조선소의 ‘기본 노동시간’은 사실상 8시간이 아니라 9시간이다. 저녁 식사도 9시간 퇴근에 맞춰서 나온다. 출근은 사무실에 7시 30분까지 당도해야 하므로 7시쯤엔 조선소 문을 통과해야 한다. 퇴근 또한 6시에 퇴근 절차인 ‘타각’을 시작하므로 조선소를 빠져나올 땐 이미 6시 반이다. 여기에 토요일 노동도 당연한 분위기다.
그러니 남아있는 노동자는 돈벌이가 절실한 외국인 노동자와 가족들이 있는 중년 남성이 다수다. 평일 9시간에 주말 근무까지 더하면 이미 52시간 초과 노동이다. 부양가족이 없는 청년들은 그토록 오래 일할 동기가 없다. 꼬박 8시간씩 일해서 받는 210만 원과 53시간을 꽉 채워 받는 300만 원의 차이는 1.5배에 달하지만 삶의 질이 몇 배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건강을 일부 희생하며 피로를 그대로 집까지 들고 와야 하는 육체노동은 특히 그렇다. 젊은 피가 돌지 않는 업종에 미래는 없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2019년에 출간됐다. 저자는 당시에도 사무실과 현장이 수도권과 지방으로 쪼개지는 현상을 염려했다. 2025년 기업은 더더욱 가열차게 수도권과 지방, 구상과 실행, 계획과 생산을 분리하려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조선소는 ‘단지 배를 생산할 뿐’인 거대 공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정치에서 해법을 찾아보려 해도 윤석열 정부가 여지를 없애버렸다. 인간다운 대우를 원해 파업했던 하청 노동자의 삶이 박살나도록 거들었다. 외국인 노동자를 더 들여올 수 있도록 특혜까지 줬다. 정치권도 문제를 알지만 해법이 좀처럼 보이지 않아 “정규직 많이 좀 뽑아주세요”, “외국인 노동자에만 너무 의존하지 맙시다” 정도밖에 말할 수 없다. 주가가 치솟아 자본은 신났지만 노동은 암울한 모습이 조선소의 현주소다.
천현우 / 용접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