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향숙씨(가운데)가 지난 19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에서 반올림 활동가들과 함께 산업재해 인정을 촉구하고 있다. 우혜림 기자
삼성전자 경기 기흥공장에서 1994년부터 2015년까지 21년 동안 근무한 정향숙씨(49)는 2022년 뼈에 생기는 희소질환인 ‘거대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왼쪽 턱관절 인근 관자뼈에 생긴 종양을 세 차례 수술 끝에 제거했지만, 왼쪽 청력과 안면 일부에 감각을 잃었다. 정씨는 산업재해라고 생각해 근로복지공단 산하 서울남부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는데 지난달 27일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정씨는 작업 중 방사선의 일종인 ‘전리방사선’ 등 위해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게 원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질판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씨는 21년 동안의 기억을 더듬어 이 병이 왜 생겼는지를 증명해야 했다. 반도체 공장에서 어떤 종류의 방사성 물질이 얼마큼 발생하고, 작업 중 얼마나 노출되고, 이 방사선과 희소질환인 거대세포종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등을 직접 밝혀내야 했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물질 대부분은 영업비밀이라 일개 노동자는 알 수 없다. 비전문가인 정씨에게 이런 노동 환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사람도 없었다.
질판위는 “전리방사선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고, 전리방사선이 거대세포종 발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정씨의 거대세포종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씨는 “산재를 신청하니 지금 와서 ‘어떤 물질에 노출된 적이 있느냐’, ‘증거가 있느냐’ 묻고 있다”며 “100만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희귀(희소)질환인 거대세포종 환자가 같은 공장에서 두 명 발생해 한 명은 이미 돌아가셨다. 그건 우연의 일치인가”라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까지 힘들게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구조가 참 서글펐다”고도 했다.
정씨는 2022년 뼈에 생기는 희귀질환인 ‘거대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두개골의 왼쪽 턱관절 인근 관자뼈 종양이 생겨 세 차례 수술로 겨우 제거했다. 정향숙씨 제공
질판위가 구조적으로 의학적 증거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구성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질병과 노동 환경의 인과관계를 폭넓게 살펴야 하는데 위원들이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기준 근로복지공단에서 공개한 위원 명단을 보면 지역별 질판위에 의사·변호사·노무사·산재 전문가 등 총 789명이 있는데, 이 중 의사가 490명으로 절반을 훌쩍 뛰어넘는다.
반도체 노동자 인권단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산재보험 제도의 취지에 어긋나는 판단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법 제도와 질판위 정비가 필요하다”며 “많은 사회적 논의에 따라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 대해서는 의학적 기준이라는 잣대만으로 협소하게 보지 않도록 사회 통념상의 기준에 따르는 규범적 상당인과관계라는 것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7년 8월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 노동자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첨단산업분야에서 발병한 질병이 희귀질환에 해당하고 그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인과관계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학 수준에서 곤란해도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또 ‘사업주의 협조 거부나 행정청의 조사 거부 등으로 작업환경의 유해요소와 노출 정도를 특정할 수 없다면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정씨는 “질판위가 ‘인과관계 없음’이라고 통보한 여섯 글자에 무력감을 느꼈다”며 “희귀병이라는 이유로 원인을 찾기 더 어렵다고 하는데, 발병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면 그저 개인의 운으로만 치부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정씨는 근로복지공단 상대로 불승인 취소 소송을 낼 계획이다.
반도체 공장에서 21년 일하다 희소종양 생겼는데···산업재해 ‘불승인’
삼성전자 경기 기흥공장에서 1994년부터 2015년까지 21년 동안 근무한 정향숙씨(49)는 2022년 뼈에 생기는 희소질환인 ‘거대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왼쪽 턱관절 인근 관자뼈에 생긴 종양을 세 차례 수술 끝에 제거했지만, 왼쪽 청력과 안면 일부에 감각을 잃었다. 정씨는 산업재해라고 생각해 근로복지공단 산하 서울남부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는데 지난달 27일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정씨는 작업 중 방사선의 일종인 ‘전리방사선’ 등 위해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게 원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질판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씨는 21년 동안의 기억을 더듬어 이 병이 왜 생겼는지를 증명해야 했다. 반도체 공장에서 어떤 종류의 방사성 물질이 얼마큼 발생하고, 작업 중 얼마나 노출되고, 이 방사선과 희소질환인 거대세포종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등을 직접 밝혀내야 했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물질 대부분은 영업비밀이라 일개 노동자는 알 수 없다. 비전문가인 정씨에게 이런 노동 환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사람도 없었다.
질판위는 “전리방사선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고, 전리방사선이 거대세포종 발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정씨의 거대세포종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씨는 “산재를 신청하니 지금 와서 ‘어떤 물질에 노출된 적이 있느냐’, ‘증거가 있느냐’ 묻고 있다”며 “100만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희귀(희소)질환인 거대세포종 환자가 같은 공장에서 두 명 발생해 한 명은 이미 돌아가셨다. 그건 우연의 일치인가”라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까지 힘들게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구조가 참 서글펐다”고도 했다.
질판위가 구조적으로 의학적 증거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구성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질병과 노동 환경의 인과관계를 폭넓게 살펴야 하는데 위원들이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기준 근로복지공단에서 공개한 위원 명단을 보면 지역별 질판위에 의사·변호사·노무사·산재 전문가 등 총 789명이 있는데, 이 중 의사가 490명으로 절반을 훌쩍 뛰어넘는다.
반도체 노동자 인권단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산재보험 제도의 취지에 어긋나는 판단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법 제도와 질판위 정비가 필요하다”며 “많은 사회적 논의에 따라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 대해서는 의학적 기준이라는 잣대만으로 협소하게 보지 않도록 사회 통념상의 기준에 따르는 규범적 상당인과관계라는 것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7년 8월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 노동자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첨단산업분야에서 발병한 질병이 희귀질환에 해당하고 그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인과관계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학 수준에서 곤란해도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또 ‘사업주의 협조 거부나 행정청의 조사 거부 등으로 작업환경의 유해요소와 노출 정도를 특정할 수 없다면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정씨는 “질판위가 ‘인과관계 없음’이라고 통보한 여섯 글자에 무력감을 느꼈다”며 “희귀병이라는 이유로 원인을 찾기 더 어렵다고 하는데, 발병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면 그저 개인의 운으로만 치부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정씨는 근로복지공단 상대로 불승인 취소 소송을 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