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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질병판정위원회의 '과학'을 고민한다

관리자
2026-02-25
조회수 2047


검은 백조를 위하여

[진료실에서 보내는 편지] 질병판정위원회의 '과학'을 고민한다

  • 검은 백조
▲검은 백조 ⓒ unsplash관련사진보기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는 진료실을 벗어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 향한다. 가기 전 내가 읽어내야 할 많은 서류는 단순한 행정 문서나 의무기록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들은 누군가가 수십 년간 일하며 흘린 땀방울이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견딘 누군가의 시간이기도 하다.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의사로서 내가 수행하는 역할은, 이 환자의 질병이 업무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의 '운명' 때문인지를 평가하여 가려내는 것이다. 회의 후 내려지는 업무상 질병에 관한 승인 혹은 불승인으로 누군가는 치료비 걱정을 덜고 업무로의 복귀를 꿈꾸지만 다른 누군가는 본인의 고통이 외면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생계 유지와 같은 차가운 현실로 내몰리기도 한다. 이로 인한 환자의 고통은 아마도 질병으로 인한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일 것이다.

과학적, 의학적 지식은 완벽한가?

이러한 탓인지 나 역시 업무상질병 판정과 관련된 중압감을 자주 경험한다. 이와 같은 무게감 아래에서 내게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오늘, 내가, 근거로 든 의학적 지식은 절대적인 것인가?' 질문과 동시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이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적 진리란 절대 불변의 법칙이라기보다 반증되지 않은, 수정 가능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그간 보아온 모든 백조들이 흰색이라 하더라도 '모든 백조가 흰색이다'라는 가설은 참이 아니다. 어느 날 검은 백조가 발견되는 순간, 이 가설은 무너진다. 따라서 언제든 틀릴 수 있는 것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과학을 더 과학답게 만든다고 포퍼는 말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과학적 근거라고 부르는 현재의 의학적 근거들은 사실 완벽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발견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전에는 직업병이라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질환들이 새로운 역학 조사와 연구를 통해 직업병으로 인정됨도 하나의 예이다. 그러나 교과서나 논문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과 유해 물질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과학적 근거의 변화는 언제나 현장의 속도에 비해 늦다. 이러한 지점에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라는 과학적 정직함과 '이 사람은 분명 일 때문에 아픈 것 같다'라는 임상적 직관은 자주 충돌한다.

'과학적 정직함'으로 인한 누군가의 절망


비교적 최근의 어느 날, 질병판정위원회에서 택배 노동자의 부정맥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그는 30대 후반의 남성으로 택배 업무를 수행하는 자였다. 택배 업무를 하던 어느 날 이 젊은 남성은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을 방문하였고 이후 검사를 통해 모비츠 2형(Mobitz type II) 2도 방실차단으로 최종 진단되어 인공심박동기를 삽입했다. 업무 시간과 내용을 파악한 결과, 주당 평균 60시간가량의 장시간 노동, 중량물 취급을 포함하여 육체적으로 고강도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음이 객관적으로 확인되었다. 심장 내과 전문의는 의학적으로 모비츠 2형 방실차단은 대개 히스-푸르키네계통(His-Purkinje system)의 기질적 손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 부정맥은 과로의 영향을 논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현재 모비츠 2형 방실차단과 과로 사이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입증한 대규모 역학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첫째, 모비츠 2형 방실차단 자체의 발생 빈도가 높지 않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표본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둘째, 이 질환은 대개 심근경색, 섬유화와 같은 심장 자체의 기질적인 변화로 인한 결과물로 간주되어 '환경적 요인'보다는 '임상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과로와 스트레스는 자율신경계 불균형을 통해 심장 전도 시스템의 안정 상태를 저해할 수 있으며, 잠재되어 있던 전도 장애를 실제적인 차단(Block)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 유력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 외 과로로 인한 관상동맥 수축이나 혈압 변화가 심장의 전도 시스템 주변의 미세 혈류 공급을 방해함으로써, 특히 기존에 심장 전도 시스템의 손상이 이미 있는 경우 모비츠 2형 방실차단과 같은 질병을 발현시킬 수 있다.

30대 후반의 택배 노동자는 분명 과로하고 있었고 그의 과로 상황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회의 참석자들이 활용한 주된 도구는 '현재의 과학적 근거'로, 모비츠 2형 방실차단은 기질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질환이며 과로와의 상관관계를 입증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하므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회의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미 한계를 갖고 출발한 연구 결과가 업무상 질병을 부정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과학적 정직함'이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절망으로 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시 포퍼를 떠올려보자면, 그날 우리가 내린 결정은 언젠가 나타날 '검은 백조'에 의해 뒤집혀야 할 부끄러운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과학적 겸손함'을 통한 희망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우리는 대개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을 믿는다. 그러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일하다 보면 '근거'라는 단어가 지닌 오만함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오늘의 '근거 부재'가 불승인이라는 마침표로 이어지기보다는 우리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검은 백조'를 위한 물음표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몇 장의 서류로는 요약되기 어려운, 수십 년간 일해 온 한 사람의 삶을 떠올려본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이들에게 명쾌한 판단이 가능해질 만큼의 과학적 근거가 쌓일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도 꽤나 잔인한 일이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나의 과학적 잣대가 어떤 이의 희망을 자르는 도구가 될까봐 두렵다. 게다가 과학적 불확실성까지 함께 고민하자니 어찌된 게 내가 아는 건 자꾸만 더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하다.

자, 그렇지만 마음을 다잡아본다. 우리가 지닌 과학적 또는 의학적 도구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염두에 둬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서 증명된 사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고통의 기원을 찾아가려 노력해야겠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전문가로서의 치열한 고민은 훗날 새로운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토대가 될 것이고, 마침내 '검은 백조'를 찾아낼 수 있는 힘의 바탕이 될 것이라 믿는다. 불확실성이 그득한 세상에서 '과학적 근거의 부족함'은 인정하고, 이 부족분은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채워 나가리라 다짐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2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류지아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직업환경의학전문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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